교육담론: 살아 있는 교육
'인천 중학생 추락사' 사건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다. 혹자는 또다시 이 문제를 "청소년 보호법"에 대한 우리 사회의 판단과 연관지으려 한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한편으로는 학생인권에, 다른 한편으로는 교육내용에 있다. 가해 학생들의 행동은 다문화가정 학생에 대한 괴롭힘의 종착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갑질이라는 형태로 만연된 파시즘적 차별과 우위의 인식이 청소년 사회에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학생인권"이라는 오랜 노력이 유용했는지 비판적으로 숙고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교사와 학생, 학교와 학생이라는 가시적 권력관계에만 집중되어, 학생과 학생이라는 비가시적 권력관계에서의 개인의 인권을 경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검토해야 한다. 우리 학생들이 학교라는 교육기관에서 배우는 것이 과연 가치..
개념(명칭)은 내용과 목적을 함의하고 있다. "대학수학능력평가시험(이하 수능)"은 대학에서 수학할 수 있는 능력의 유무를 가늠해 보는 시험이다. 고등학교에서 배운 교과목 지식의 습득 정도를 평가했던 과거의 학력고사와는 다르게, 그 지식들의 다양한 활용 능력을 점검할 수 있는 문제들이 출제된다. 수능의 출제자들은 자신들이 제시한 문제를 풀 능력이 되는 학생이어야 고등교육기관에서 이뤄지는 학문적 탐구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정말로 그런가? 대학수학능력은 몇점을 맞으면 가질 수 있는 것일까? 모두 다 맞아야 그 능력을 가졌다 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맞은 점수와 비례한 능력이 있는 것인가? 상당 수의 학생들은 자의든 타의든 여전히 수능점수에 맞춰서 대학을 결정한다. 그렇게 해서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인고의 ..
역시나 다르지 않았다. 2019년 대학수학능력시험은 여전히 변별을 최우선의 과제로 출제되었다. 출제자의 음흉한 늪에 속절없이 빠져든 순진한 학생들은 자괴감으로 시험장을 떠났을 것이다. 그럼에도 출제자들은 높은 점수를 받아 살아남은 몇몇 학생들이 있기에 자신들의 행위가 정당하고 적절했다고 자위하겠지. 최소한 자신들이 자행하는 괴롭힘을 견뎌내야 이 세상의 밝은 빛을 볼 자격이 있다고 말하겠지. 그 불가능한 신분상승의 문턱을 넘어설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고문은 도대체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일까? 정부가 주장하는 '공교육 정상화', 특히 고등학교교육 정상화는 더 이상 논의될 필요가 없다. 대학수학능력시험과 대학입시를 목표로 둘 수밖에 없는 교육제도 속에서 이미 모든 고등학교교육은 제 기능을 다하고 있기 ..
'숙명여고 시험지 유출'사태의 윤곽이 점차 드러나고, 관련자들을 처벌하는 단계가 되었다. 사태수습에 압장서는 비대위는 아직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강력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공교육을 못믿겠다고 말하지만 공교육에 남아 있어야만 하는 이 시대의 아이러니 속에서, 수능이며 학종이며 그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들지 않지만 여전히 대학입시에서 내 자녀가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나라 교육 정상화의 키가 대학입시와 맞물려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동의한다. 현존하는 두 가지 방식은 서로를 보완할 것이라는 믿음 속에서 저울에 올려져 있고, 그래서 때로는 수능으로 때로는 학종으로 기울여 보지만, 여전히 평행을 찾기는 어렵다. 나라의 교육근간을 확고히 하겠다는 취지로 세워진 '국가교육회의'도 결국 핑퐁게임만..
성큼 다가 온 수능시험에 올해도 최선을 다한 수험생 모두 원하는 좋은 성과를 얻기를 바란다. 다만 우리 사회에서 대학입학이 여전히 잘 받은 교육의 척도로 여겨진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학생의 행복한 학창시절과 배움의 즐거움을 보장하겠다는 국가의 교육정책은 늘 허울뿐이다. 정부가 고등학교의 마지막을 줄세우기로 끝내면서, 공교육 정상화나 혁신학교를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한다. 질문해 봐야 할 것은, 왜 정부가 수학능력시험을 주도하는 것인가? 지필시험과 성적 외에 대학입시의 다른 방법은 정말 없는 것일까? 평가와 선발의 방법과 기준을 바꾸는 일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것이 교육을 살게 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수능과 학종의 양갈래 길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지 말자. 두 길 모두 잘못된 길이다...